학생봉사동아리 아가페 가 만들어지기까지
뇌성마비 2급 장애를 극복하고 지난해 우리대학 로스쿨에 입학한 김승일 씨(법학전문대학원 1년). 그는 학생봉사동아리 아가페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만나 봉사동아리를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물었다. 대학에 다닐 때 한 회사의 홍보대사 장학생으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1년간의 기간이 끝나고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과외를 하다 알게 된 전라북도 김제의 중 고등학생들과 아가페 라는 봉사활동 동아리를 만들게 됐습니다. 처음 아가페 의 활동은 작은 손길에 불과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소수의 학생들만으로 봉사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현재는 봉사를 하고자하는 학생들이 모여 40명의 학생들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원봉사센터에 등록해 노인전문요양병원, 샤론의 집등 양로원이나 어린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지속적으로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7년 동안 매주 2차례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김승일 씨는 현재 인권변호사 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이지만 시간을 쪼개 봉사활동에 열정을 쏟고 있다.
지역의 대학생들과 함께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을 돕고 장애인과 노인의 사회적 차별에 대해 대응책을 알려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년 전부터는 아가페 라는 정식명칭을 가진 봉사단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통해 제가 갖고 있는 것들을 나누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선천적인 뇌성마비를 갖고 태어나 장애와 관련된 다양한 기관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에 대해서 더 알 수 있었고 저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어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봉사활동의 내용과 소감
그에게 학생들이 어떤 봉사활동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 물었다. 중 고등학생들이 하는 봉사활동이다 보니 하는 일은 한정적이기 마련이죠. 주로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고 어르신들의 말벗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과 같은 때에는 행사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라며 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아가페 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보람을 느낀 일에 대해 묻자 힘든 사람들이 웃음을 찾을 때라고 말하는 김승일 씨.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하며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지만 이를 통해서 보람을 느끼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기관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데 원장님께서 나와서 고개 숙이며 인사했을 때는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시스템을 구축해 중간관리자 없이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해나갈 수 있는 동아리를 만들 것이라는 김승일 씨는 학생들의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에 임하기를 바라고 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까지도 자발적으로 나눔을 이어가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하거나 기부하는데 인색한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자신보다 힘든 사람들을 도왔으면 합니다.
인권변호사를 꿈꾸다
어릴 적 의사를 꿈꿨다는 김씨, 그는 장애인과 여성의 인권이 무시되는 세태를 보고 인권변호사의 꿈을 꾸게 됐다. 사실 고등학교 이전까지만 해도 큰 어려움이 없이 살았습니다. 90년대 말 고등학교 시절에 외환위기 사태로 아버지께서 실직하셨습니다. 저는 대학진학을 포기해야 했죠.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습니다. 저와 동생에게 빚쟁이들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들른 청소년 직장센터에서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곳에서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과 여성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인권을 침해받는 모습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폭행과 기초생활수급비 횡령은 물론이고 장애인들끼리 임신을 할 경우 강제로 임신중절수술을 시키는 등 그들의 인권은 무시당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집단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 자신이 무력해보였습니다. 가정폭력이나 성폭행 등 사회적 약자들 대상의 사건들이 밝혀지지 않고 묻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장애를 갖고 있어 이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죠. 성폭행을 당했는데도 피해자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보였어요. 법에 대해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때였던 것 같아요. 그는 인권변호사의 자격명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직 인권변호사라는 명칭이 명확하지 않아요. 인권변호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사회적 약자를 변호해주는 만큼 상대적으로 비용을 적게 받아야 훌륭한 변호사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요. 비용의 문제를 떠나 명확한 개념이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대학은 그에게 희망이자 벽
인생에 있어 행복했을 때와 힘들었을 때에 대해 묻자 대학이라고 말한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저를 낙오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치킨을 배달하고 대리운전을 하는등 생활비를 벌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죠. 그러던 중 대학에 합격하게 됐고 입학한 후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웃음). 그렇지만 대학에 입학해 혼자 서울에서 살게 되었고 가족들과 흩어져 지내면서 매우 힘들었습니다. 병을 앓고 계신 부모님을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평일에는 서울에서 보냈지만 주말에는 김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휴학이 잦아졌고 공부보다는 일에 더 신경을 쓰게 됐습니다.
로스쿨에 입학하다
우리대학에 3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김승일씨, 그에게 로스쿨에 입학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물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사법고시를 통과하거나 로스쿨에 입학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당장 사법고시를 준비할만한 여유가 없었어요. 매일 과외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거든요. 우리대학 로스쿨 교수님께서 지역인재를 양성하겠다 는 기사를 본 것이 원광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한 계기가 됐습니다. 입학한 후 학교시설이 잘 돼 있어 불편함 없이 다니고 있습니다. 교수님들과 로스쿨 선후배들도 많이배려해 주십니다.
보육원을 만드는 것이 최종목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그저 지금처럼만 살고 싶다고 말한다. 로스쿨은 한 학기 다녔는데 몸이 안 좋아져 현재는 휴학중 입니다. 복학하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할 예정이에요. 고향인 김제에서 인권을 무시당하고 있는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또한 가족들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는것만으로도 큰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보육원이 없어져 모든 아이들이 자신의 부모 손에서 자라는 것이겠지만 조금더 나이가 들면 제 보육원을 만드는 것이 최종목표입니다.
혁신은 자신으로부터 온다
그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패배의식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저는 혁신과 혁명이 모여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 속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목표의식을 갖고 살아갔으면 합니다. 라며 목표의 중요성에 대해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가페 학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아가페 에서 활동하는 학생들에게도 항상 잔소리를 합니다. 제가 학생들의 눈이 아닌 어른의 눈으로 아이들을 보기 때문이죠. 놀고 싶을 나이에 봉사활동을 계속 해나가는 학생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가 오길 바랍니다. 고 말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애인과 여성을 위한 인권변호사가 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하는 김 씨. 그의 행보를 기대해본다.
강신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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