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3호-1-국내 최초로 의료용 CT 개발

교수님은 국내최초의 의료용 CT를 개발하셨는데 연구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우리대학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던 일본중부에 있는 쭈부대학 남바 교수 얘기부터 시작해야겠군요. 남바 교수는 X-ray 망원경을 개발하고 있었어요. X-ray 망원경은 우주에 있는 물질을 탐구하기 위해서 우주로부터 날아오는 빛 중에서 X-ray를 모아 분석하고 연구하는 기술입니다. 첨단 정밀 공학 기술을 요하는 굉장히 어려운 분야였죠. 그 분이 개발한 기술은 일본의 인공위성위성에 탑재 돼 우주를 관찰하는 데 쓰이고 있었고요. 당시 우리대학 송천은 총장님은 남바 교수의 기술을 이용해 공동으로 연구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하셨어요. 우주를 탐사하는 기술을 어떻게 의학에 응용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그러나 총장님께서 자네에게 일생일대의 기회일 수 있는데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보지 않겠냐 고 말씀하셨어요. 거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X-선현미경 이에요. X-선 망원경은 아주 멀리 있는 것을 축소시켜 보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반대로 하면 X-선 현미경이 됩니다. 작은 것을 크게 확대시키는 것이 현미경이잖아요? 의학에는 세포, 분자를 직접 관찰하는 것이 현미경이에요. 일반적으로 쓰는 광학 현미경은 세포의 표면밖에 볼 수 없어요. 그래서 세포의 내부 구조를 보려면 전자 현미경을 사용해야 하는데 전자 현미경은 세포를 죽여서 자른 후에야 내부 구조를 관찰할 수 있어요.
그러나 X-선 현미경은 살아있는 세포를 엑스레이가 투과하기 때문에 고해상도로 관찰할 수 있죠. X-선 망원경의 나노정밀 기술을 이용해 엑스레이렌즈를 만들고 X-선 현미경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제 아이디어였어요. 이를 남바 교수에게 제안하니 흔쾌히 승낙하더군요. 이 기술을 이용해 진단한다면 암세포를 분자 수준에서부터 진단할 수 있으니 조기에 발견해 치료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교수님께서 책임 교수로 있는 병원특성화연구센터의 성과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십시오.

제가 책임교수로 있는 원광대학교병원 병원특성화연구센터는 지난 10월 디지털 영상기술 전문기업인 나노포커스레이와 공동으로 뇌 두경부 관절을 촬영 할 수 있는 부위한정용 CT 를 개발해 출시했어요. 이 CT는 국내최초의 의료용 CT로서 고해상도(140 micrometer), 저방사선선량 (<1.4mSv)의 모바일콘빔 볼륨형 CT에요. 적용분야는 사지관절두경부 뇌 치과 이비인후과이며, 수술실, 중 환자실, 응급실, 앰뷸런스 등 다양한 곳에서 활용할 수 있어요. 부위한정용 CT를 개발하기까지 실험동물용 마이크로 CT와 나노 CT를 먼저 개발하면서 CT에 대한 원천기술개발이 이뤄졌습니다.
실험동물용 마이크로 CT와 나노 CT는실험용 쥐를 죽이지 않고 살아있는 상태에서 관찰할 수 있어 정확한 연구가 가능합니다. 임상용 개발과정까지 거쳐 제품화되기 까지는 총 7년의 시간이 걸렸어요. 연구개발 끝에 우수한 임상제품이 개발돼 시장에 출시하게 됐어요. 국내에서는 디지털 엑스레이가주를 이루면서 CT는 전무한 상태였죠. CT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는데, 이 시장을 어떻게 뚫어야 할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현재 의료기기의 트랜드는 스마트화, 소형화, 모바일화 되고 있어요. 트랜드에 맞춰 초음파 시장이 변화하고 있는 것처럼 CT도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판단해 개발에 착수했 습니다. 기존의 CT에 비해 소형화 되면서 대학과 종합병원용이 아닌 개인 병의원에 적합한 CT를 개발하려고 했습니다.

제1223호-2-윤권하 교수와 인터뷰 장면

의료용 CT 기술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실 계획입니까?

고해상도 CT 영상 기계가 상품화됐어요. 이 기술을 인체나 생체까지 응용할 수 있는 분야로 연계하고자 익산 방사선 영상과학 연구소가 설립되었습니다. 전라북도는 익산시와 같이 영상 방사선 사업을 우리지역의 특화사업으로 지정했어요. 전북테크노 파크 산하에 종합의료 과학 산업 단지에 15만평을 조성하고 방사선영상기술센터를 설립했어요. 제가 센터장을 맡고 있고 20여개의 기업체들이 입주하게 되었어요. 우리대학이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우리대학은 산학융합캠퍼스로 이끌어 갈 계획이에요. 먼저 산 학 연을 형성하고 우리대학은 이 중심에서 방사선 의료기기의 시스템, 장비에 핵심 원천 부품과 소재 기술을 확보해 핵심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부품, 소재를 개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연구개발을 계속해 우리대학이 위치한 익산이 의료 영상분야와 관련해 아시아 태평양의 메카가 되는 도시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최소한 만 명 정도의 인력이 상주하면서 거점도시로 성장하는데 우리대학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죠. 산 학 연에서 대학은 핵심적인 브레인 역할을 하는 인재양성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교수님은 학창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남들보다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어요.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강진중학교를 졸업하고 금오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그 당시에는 인문계고등학교보다 공업고등학교가 더 인기가 많아서 최상위권 학생들만 추천을 받아 들어갈 수 있었어요. 각 중학교에서 1등하는 친구들만 모인 학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금오공업고등학교는 정부차원에서 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많은 지원을 했어요. 학비, 기숙사 생활비용을 내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쯤 정권이 교체되면서 이러한 지원을 받은 학생들은 나라에 봉사해야 한다는 이유로 바로 군복무를 시켰어요. 개인적으로 꿈꾸던 대학을 가지 못해서 굉장히 좌절했어요. 공군에 입대해서 5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중사로 전역했습니다. 제대 후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 수없이 고민하면서도 여전히 대학에 가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어요. 또한 군복무를 하면서 한시도 꿈을 잊어버렸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대학을 가기로 결심했어요.

 

교수님께서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셨는데, 왜 공대로 진학하지 않으셨는지요?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제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인문계열 입시를 준비했고 경제학과에 입학했습니다. 84년도에 입학할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민주화운동이 뜨겁게 전개되던 시기였어요. 저도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권 대열에 합류했고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어요.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도망 다니던 기억이 나네요. 대학교 2학년 즈음에 저는 사회에 기여를 하고 싶었어요. 마침 경영학과 지도교수님을 찾아뵈었는데,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사회가 어떻게 변하든지 꼭 필요한 직업이 의사 라고 말씀 해주시더군요.
그러시면서 의대에 가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어요. 단 한 번도 의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해보지 못했거든요. 그때 제 나이가 27살, 또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였죠. 그렇지만 꼭 가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 아니었어요. 6년간 학비를 내주셔야할 부모님께는 큰 부담이었죠. 부모님께서는 제가 다니던 대학의 경제학과를 졸업해도 취직이 될 텐데 갑자기 의대에 가겠다는 제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셨어요. 부모님을 어렵게 설득시키고 5월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우리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대학 교수가 된 계기를 말씀해주세요.

저는 의대 졸업 후, 큰 곳에서 배우기 위해 서울아산병원에서 인턴을 시작했어요. 전공의로 영상학과 레지던트를 했습니다. 그 당시 오용호 주임교수님이 미국 코넬대 교수로 계시다가 오셨어요. 특별히 저를 뽑아주셔서 전공에 대한 기초를 잘 다져나갈 수 있었어요. 전공의 3년 차에 외부 학회 발표가 있었는데 그때 쓴 논문이 우수논문으로 뽑히기도 했어요. 레지던트가 끝날 때쯤 우리대학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모교에 교수로와서 학생들을 가르쳐보라고요. 불러주고 찾아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 감사해 모교로 돌아왔어요. 모교에서 전임강사, 조교수로 지내면서 1년에 20편 정도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영상학과에 활기를 불어 넣고자 많은노력을 했죠.

 

교수님의 좌우명은 무엇인가요?

제 좌우명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입니다.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에 대한 전체적 흐름을 형성하면서 끈기 있게 연구해야 합니다. 수 많은 연구를 하지만 연구로만 끝나지 않고 산업화까지 연계해 나가야 합니다. 저도 연구에 착수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연구비 지원을 받는 것부터 해서 직접 알아보고 설득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일관된 꿈을 유지하되 큰 꿈을 꾸는 것 입니다. 세상은 굉장히 넓고 할 일도 많고 다양하니 큰 꿈을 꿔야 되겠지요.
마음을 열고 큰꿈을 가지세요. 우선 많이 보고 견문을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견문을 넓히는 데에는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어요. 직접경험은 기회가 되면 많이 여행하고 체험하며 넓혀 나갈 수 있어요. 간접경험은 책을 통해서 쌓아가는 것이에요. 책에는 세상에 거의 모든 지식이 담겨 있잖아요? 두 번째는 그 꿈을 이루어 나가야합니다. 꿈을 이루어 나가는 데는 강한 추진력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실천의 기본은 일단 공부 입니다. 단순히 책만 보는 것이 공부는 아니겠지요.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깊게 알아가는 것이 공부입니다. 꿈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친구든 선후배든 같이 꿈을 꾸어 나가세요. 세 번째로는 멘토 에요. 자신의 꿈으로 가는 길에서 언제나 조언 받을 수 있는 멘토가 많을수록 좋아요. 멘토에게 조언을 받아 자신의 길을 찾아 나가길 바랍니다.

김고은 기자

goeunkr@w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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