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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인터뷰

제12회 한국토목문화대상 문화부문 수상 김화숙 교수(무용학과)
제12회 한국토목문화대상 문화부문 수상 김화숙 교수(무용학과)
신문방송사2013-11-08

제1233호-1-제12회 한국토목문화대상 문화부분 수상 김화숙 교수(무용학과)

제12회 한국토목문화대상에서 문화부문에 선정됐는데 수상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전공분야에서의 수상과는 달리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이 반영되는 대회에서 수상해 뿌듯합니다. 제12회 한국토목문화대상은 각 분야의 원로들이 주로 수상을 하는데 최초로 생긴 무용분야에서 인정받아 영광입니다.

 

한국토목문화대상이란 어떤 상인가요?

한국토목문화대상은 토목계 원로 고(故)김형주 선생께서 후학양성을 통한 토목기술의 발전을 위해 대한토목학회에 사재를 기부해 조성된 상입니다. 고인의 유지에 따라 토목분야뿐만 아니라 비토목 분야인 언론, 문화부문에서도 매년 수상자를 선정해 시상하고 있습니다.

 

국립현대무용단 초대이사장을 역임했는데 국립현대무용단이란 어떤 단체인가요?

국립현대무용단 설립은 현대 무용인들에게 숙원사업이었습니다. 국립발레단, 국립무용단은 올해로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현대무용의 경우 국립현대무용단이 존재하지 않아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현대무용 2세대로서 몇 십년간 만들어지길 소원했습니다. 현대무용인들의 숙원사업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더군다나 제가 국립현대무용단의 초대이사장을 역임해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초대이사장으로서 지난 2011년 7월부터 국립현대무용단을 이끌었습니다.

 

국립현대무용단 이외에도 어떤 활동을 했나요?

저는 1989년에 만들어진 한국무용교류학회를 6대연임하며 학회장으로 일했습니다. 총 18년 동안 단체를 이끌었습니다. 이외에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예술 감사 지원제 문화 교육 분야 초대 위원장을 역임해 무용예술 확산에 힘썼습니다. 또 한국무용교육원에서 현재 이사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예술적 무용은 많이 발전했지만 교육적 측면에서는 부족한 무용을 교육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대학의 교육에서는 무대 위에서 춤추는 무용수만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초 중 고등학교 교사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원대졸업생으로 구성된 김화숙과 현대무용단 사포 에서 예술 감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현재 28회를 맞이하고 있는 현대무용단 사포 는 1984년에 창설됐으며 제가 정년을 맞이하는 2015년에 30년을 기념 합니다. 벌써 원광대에 온지 30년이 지났다니 정말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1233호-2-김화숙&현대무용단 '사포 공연모습'

세계현대무용사전 과 옥스퍼드무용사전 에도 등재됐는데 무용사전에 등재되는 기준이 있나요?

미국의 비평가들이 무용사전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요구하는 조건에 맞아야 합니다. 무용가에 대한 언급을 하거나 무용가의 창의성 등을 평가합니다. 비평가들은 어떤 작품이 어떤 장소에서 공연되는가를 주로 평가합니다. 처음 무용사전에 등재될 당시 약 40명의 예술가가 물망에 올랐습니다. 그 중 7명이 심사기준을 통과해 세계현대무용사전 에 등재 됐습니다. 세계현대무용사전 에 등재된 7명 중 2명이 옥스퍼드무용사전 에 등재됐는데 그 사이에 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옥스퍼드 무용사전 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창의적인 작품을 많이 선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역사적인 사실을 작품화 한 일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창작안무였는데 1994년부터 1998년까지 5년간 3부작을 기획해 공연했습니다. 첫 작품인 <그 해 오월>은 1995년 5월 31일 광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했습니다. 총 1시간 30분 동안 일곱 개의 이미지들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1998년 12월에 재공연을 했습니다. 두 번째 작품인 <편애의 땅>은 2년 뒤인 1997년 4월 서울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서 공연했습니다. <편애의 땅>은 그 해 평론가 상을 받았습니다. 완결편인 <그들의 결혼>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했습니다. 22명의 무용수들이 60여 분 동안 7개의 이미지들을 풀어내며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윤리적 시각에서 조명했습니다.

 

어렸을 때 꿈도 무용수였나요?

어렸을 때 꿈은 무용수가 아니었습니다. 중 고등학교 때 꿈은 현모양처였습니다. 무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레슨을 받은 것은 고등학교 일 학년 때부터입니다. 중학교 때도 무용반 활동을 했지만 오히려 KBS 합창단 에서 활동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무용반에 들어가서 전문적인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무용반의 별명은 폐병 환자 였는데 그만큼 햇빛을 받지 못하고 연습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 연습한 3년이 10년의 훈련과 맞먹을 정도로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이화여자대학교에 진학해 더욱 전문 적인 무용을 시작했습니다.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을 하자 공연을 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명동에는 무용을 공연할 수 있었던 극장이 한 개 있었는데 졸업하자마자 극장을 빌려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주변 교수님들과 무용계에서는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순수한 열정 하나로 버텨 나갔습니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보내니 무용에 대해 더 배워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양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고 무용이란 어떤 것인지 더 심도 있는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공부 할 당시에는 내가 교수가 되야겠다 라는 생각보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직도 무용을 하나요?

물론입니다. 곧 정년을 앞두고 있지만 무용은 계속 하고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사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움직임은 오감을 활성화 시키고 감각을 살아나게 해 어떤 일이든 가능하게 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움직임을 통해 모든 감각을 열고 이로 인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점은 일반인들에게 적용하더라도 큰 효과가 나타납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금란여자고등학교에서 7년을 가르쳤는데 당시 학생들이 무용을 통해 사고하는 것에 많은 도움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무용은 몸을 움직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노화를 방지합니다. 무용하는 사람은 잘 늙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 이유도 몸을 움직이며 항상 오감을 열어 놓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현대무용이란 어떤 예술인가요?

현대무용은 상상력과 창의력의 보고 입니다. 현대무용은 자유로운 춤이고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어떤 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춤이지요. 현대무용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동시대의 춤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작품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무엇인가요?

저는 지금까지 총 80편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앞서 말씀드린 <광주 민주화운동 3부작>입니다. 주제가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를 다룬 작품이라면 안무가로서 해보고 싶었던 여러 기법들을 적용할 수 있었던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또 <찡깽맨이의 편지>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습니다. 찡깽맨이는 징을 만드는 사람을 말하는데 이 작품은 가장 많은 공연 횟수를 기록했습니다. 1983년에는 일본 무용작가 10인 전에 초청됐고 1985년 제23회 파리 국제무용제에 초청됐으며, 국내에서도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공연했습니다.

제1233호-3-김화숙&현대무용단 '사포 25주년 공연모습'

인생의 좌우명이나 목표가 있나요?

세월이 지나고 보니 춤이 곧 내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인생은 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춤을 추며 살아갈 것 같습니다.

멋진 좌우명보다 항상 마음 속으로 되새기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를 보람있게 라는 말입니다. 점과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과 선이모여 그림이 되듯 하루를 열심히 보람차게 살아야 앞으로의 미래가 그려진다고 생각 합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루를 보람차게 살며 또 다른 그림을 그려갈 예정입니다.

 

학생들을 위한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안타까운 점이 많습니다. 너무 코앞만을 바라보고 큰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1년, 2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오늘을 성실하게 보내고 대학생활 4년 동안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학생활에 충실한 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도영 기자

ehdud3114@wk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