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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인터뷰

위기청소년 대안교육 공로 국민훈장 이강래 교수(경영학부)
위기청소년 대안교육 공로 국민훈장 이강래 교수(경영학부)
신문방송사2014-07-22

“나눔 실천, 힘들 때마다 주변의 후원과 도움 받아”

우리대학 이강래 교수가 위기청소년을 위해 노력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여성가족부로부터 국민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그는 위기청소년이 어른들의 잘못에서 비롯됐으며, 사회구성원들이 이들을 안아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건전한 사회개혁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 이강래 교수(경영학부)만나봤습니다.

이강래 교수(경영학부)

국민훈장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본격적으로 위기청소년을 품기 시작한 시기가 언제입니까

모든 문제는 자기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청소년 문제만큼은 어른들의 책임입니다.자식에 무관심한 부모, 가정에 소홀한 부모가 발화점인거죠. 그런 가정 속에서 아이들은 상처받습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철저히 소외되죠.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은 사랑을 주는 법도 배우지 못합니다. 나눔으로써 찾아오는 회복이나 기쁨을 알지 못하는 거죠. 위기청소년들은 감정의 분출구를 폭력과 자해에서 찾습니다. 작은 갈등도 폭력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맥지회는 이런 아이들에게 최혜자(最惠者) 정신을 가르칩니다. 최혜자정신은 가장 많이 베푸는 사람이 가장 값진것을 얻는다 는 의미에요. 내면의 상처는 나눔으로써 회복해야 해요. 연필이 없는 친구에게 자신의 연필을 건네주고 과자 하나를 나눠먹을 수 있을 때, 아이들의 상처가 아물고 건전한 사고가 가능해집니다. 아이들에게 나눔을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나눔 을 가르치면서 힘들었던 경험을 들려주세요.

거미가 내려왔다. 저는 이렇게 말해요. 하늘이 돕는다는 의미입니다. 청소년사회교육원을 운영하면서 재정적으로 가장 힘들었어요.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거미가 내려왔지요. 누군가 5천만원을 후원하고, 기업체에서 1억원을 기탁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수도 없이 해왔습니다. 진심으로 좋은 일을 하려할 때 인연도 찾아오는 것입니다. 신기하네요. 힘들 때는 사재를 내시기도 하셨죠. 후원금이 적을 때는 위기청소년을 관리하는 선생님들의 월급조차 버겁습니다. 하지만 좋은 뜻을 갖고 헌신하는 그들의 월급을 미루고 싶진 않았어요. 본격적으로 교수생활을 시작하고부터 제 소득으로 그들의 월급을 채울 때가 많았습니다.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물론 안사람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자식보다 위기청소년에게 관심을 쏟는다 는 것에 불만을 가진 아내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관계는 외줄타기를 하는 듯 위태해져갔 습니다. 갈등이 심화되자 우리는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 곳을 방문하며 서로 못 다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밤, 안사람이 제 손을 꼭 잡아주더군요. 그렇게 관계가 회복됐습니다.

교수님께서 조선대 재학 중이실 때 5 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들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우리에겐 울분이 있었습니다. 당시, 데모를 하던 학생이 있었다면 그냥 지켜보는 학생도 있었어요. 그들은 우리(데모하는 학생)를 사회 부적응자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어지러운 사회를 향해 철야 농성을 벌이고 단식을 진행하고 있을 때, 그들은 도서관 난간에서 태평하게 담배를 물고 있었어요. 나랑 상관없는 일 , 공부나 열심히 하지라는 식이었습니다. 옆에서 응원은 못할망정, 도리어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비웃었지요. 우리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들보다 더 의미 있게 사는 모습을 말이죠. 뜻이 있는 학생끼리 모여 맥지회(麥志會) 를 결성했습니다.

이강래 교수(경영학부) 밴드

이강래 교수(경영학부) 밴드

맥지회 의 맥지 가 무슨 의미에요?

맥지는 보리 맥(麥) 자에 뜻 지(志) 를 씁니다. 보리의 뜻, 보리의 마음이란 의미에요. 여기서 보리는 서민을 상징합니다. 가진자보다는 갖지 못한 자를 위한 모임인거죠. 맥지회는 60~7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결성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20명 정도만이 남더군요. 아무래도 장래에 대한 부담이 컸겠죠. 교수님도 같은 부담을 느꼈을 텐데요. 어차피 취직할 수 없었어요. 제가 1983년 대학을 졸업했는데, 당시 학생운동 전력이있는 학생들은 전과범이 됐거든요. 그 어떤기업에서도 받아주지 않았어요. 학생운동이 죄로 취급된 거죠. 결국 석사과정을 밟게 됐습니다. 그 후 1985년도에 맥지회를 결성했고, 제 주도 하에 모임을 이끌어갔습니다.

맥지회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했나요?

그룹스터디를 했어요. 타인을 품으려면 저희가 먼저 성장해야했어요. 위기청소년들을 가르치고 품어준답시고 계획 없이 그들을 받아들여선 안돼요. 먼저 가르칠 수 있는 지식을 쌓고 그들이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구성원 모두가 같은 뜻으로 움직였어요. 직장이 있는 회원은 월급을 내어주고, 저와 같이 전과범으로 낙인찍힌 회원들은 호프집을 운영함으로써 자금을 보탰습니다. 종교단체로부터 기부를 받는 회원도 있었어요.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들이 벌어오는 돈이 얼마나 되겠어요. 재정적으로 많이 힘들었고 이로 인해 갈등하는 회원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남은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스터디 모임을 가졌습니다. 여러가지 주제를 놓고 주제를 바꿔가며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개인 공부를 하기도 했죠. 스터디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 이념에 휘둘리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념은 수단에 불과해요. 이념이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제시된 한 가지 견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념이 인간을 앞서있기도 해요. 이념을 위해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이죠. 주종이 역전된 겁니다. 당시 시대상황이 좋지 못했던 만큼 이념적인 갈등이 잦았어요. 이념만을 주장하는 학생들이 몇몇 보였습니다. 맥지회는 이념투쟁을 하고 온 후에도 그룹스터디를 통해 인문서적을 탐독함으로써 인간성을 견고하게 다져갔습니다.

기성세대는 흔히 우리 2030세대에게 꿈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역으로 여쭙겠습니다. 교수님께서 갖고 계신 꿈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위기청소년들을 위한 성소를 세우고 싶어요. 김영삼 정부 때 민주화운동을 위해 힘썼던 학생에게 보상금을 수여했습니다. 8명에서 9명 정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는 병주고 약주는 것 같아 지금껏 보상금을 거절해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보상금을 받아 개인적으로 쓰지 않고 위기청소년을 위해 사용하는 거죠. 광주 무등산 밑에 1만1천평 정도의 땅이 있습니다. 1994년도쯤등기도 났는데, 여력이 없어 시설을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밭을 갈고 나무를 심어보는 등 위기청소년을 위한 체험학습공간으로 활용되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 시설을 세우고 위기청소년들의 상처를 회복시키고, 사회에서 떳떳하게 생활할 수 있는 인재로 키우고 싶어요. 지난 20여년의 경험과 시행착오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김정철 기자 dokr9318@wk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