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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인터뷰

대학신문, 아카데미즘의 구현과 저널리즘 추구
대학신문, 아카데미즘의 구현과 저널리즘 추구
대외협력홍보과2010-10-26

나춘균 동문(한문교육과 77학번/PLUS D&C 대표이사, 원기회 회장[원대신문사에서는 창간 51주년을 맞아 '원대신문사 기자 동문회(이하 원기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나동문을 만나 30여 년 전 원대신문사에서의 추억과 원기회 회원들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창간 51주년 축하… 시간의 힘 무거워
30여 년 전 원대신문사에서 기자활동을 할 당시 창간 20주년을 맞아 특집호 발간하던 때가 아직까지도 생생합니다. 특집호를 내느라고 꼬박 밤을 새면서 동문 선배들을 찾아 원고를 청탁하기도 했으며 늘어난 지면 광고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머릿속에 선합니다. 그런데 벌써 51주년을 맞이했다고 하니 시간의 힘이 새삼 무겁게 느껴집니다.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는 신문 필요
대학신문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제가 대학신문사에서 활동할 당시는 외부적인 환경, 특히 유신 말기의 경직된 사회 분위기와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의 계엄사태 등으로 인해 경찰(군부)의 간섭이 심했던 때입니다. 전북도청에 있는 계엄사령부 검열반에서 편집 검열을 받아야 윤전기를 돌릴 수 있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현재는 매스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학생들의 대학신문 외면 등으로 대학신문이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학이 존재하는 이상 대학신문의 본연의 정체성, 즉 아카데미즘 구현과 저널리즘 추구라는 핵심적인 가치는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고 이를 주도하고 반영하는 신문이 돼야 독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0여 년 전 치열했던 기자 되기
30여 년 전 당시에는 학생기자 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경쟁이 치열했고 수습기자의 꼬리를 떼는 일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20여 명 내외의 기자들은 그야말로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어떤 때는 막무가내로 여학생 기자들에게도 막걸리 사발을 의무적으로 돌렸고 선·후배 사이의 위계가 엄격하게 유지되기도 한 반면에 후배들을 대하는 선배들의 애정은 참으로 각별했었다고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선·후배 사이의 끈끈한 정이 결국 원기회라는 모임을 결성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리역 폭발사고 취재, 가장 기억에 남아
수습기자로 있을 때 이리역 폭발사고가 있었습니다. 1977년 11월경 신문사에서 편집을 하고 있었는데 ?쾅? 하는 폭음과 함께 2, 3, 4층 유리가 깨져 내렸습니다. 바로 우리 기자들은 폭발현장으로 취재 차 출동했습니다. 역까지 가는 동안 밀려나오는 피난 행렬을 만났고 역 주변에 살고 있던 선배기자 가족의 안위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폭파현장을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취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취재가 신문사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입니다.

3년의 귀중한 시간, 미래의 자양분
대학신문 기자로 동분서주하다보면 사물과 사회현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또 정론을 추구하는 사회적 정의감 등으로 인해 사유의 확장과 폭넓은 인생관을 확립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귀중한 자산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원기회 회원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언론에 종사하는 회원들이 가장 많고 문단에 명성을 떨친 소설가로서, 학계에서, 또는 사업가로서 지역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전공과 무관하게 건설업을 하고 있지만 전라북도 도시계획위원과 국가균형발전위원 등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원대신문사 기자 활동이 아직까지 제 인생의 자양분이면서 삶을 이끌어 가는 큰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2007년 10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