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에서‘음대생’으로
“어릴 적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학생이었어 요. 그러나 성악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은 못 했죠”라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윤기훈 동문(음 악교육과 87학번).
그는 유년시절 교회 성가대 활동과 군산동고 등학교 한얼 중창단 활동으로 음악에 대한 관심 을 키우게 됐단다. 때로는 담임선생님에게“노 래를 제법 잘한다”,“ 소질이 있다”,“ 성악을 전 공해 보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입단한 합창부에선 도대회에 나가 일등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로 성악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결국 부모님의 뜻에 따라 전자공학과에 진학하게 됐단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한 학기만에 휴학을 했고 음악공부에 매진하기 위해준비했다.“ 음악대학입학을준비하는다 른 사람들보다 준비기간도 짧고, 실력도 많이 부족해 누구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어요”라며 대 학시절을 회상하는 듯 했다.
노력 끝에 그는 원 광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에 입학해 성악 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sws_blockquote_endquote align="" cite="윤기훈동문" quotestyle=style01]부족한 실력이기 때문에 꼴등으로 입학했으리란 생각을 했어요. 또 음악의 꿈을 펼치게 해 준 원광대에 입학한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sws_blockquote_endquote] 라며 멋쩍게 웃었다. 졸업할 때까지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연습했다고 한다. 노 력의 결실이 졸업정기연주회에서 실기장학생 으로 뽑혀 솔리스트로 공연을 펼치게 됐다고.
78:1의 경쟁, 전 세계 음악전공자들과의 경쟁
대학졸업 후 2년의 시간을 군대에서 보내게 됐다. 그 후 그는 시립합창단에 입단하기 위해 경쟁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는 전국에 국립합창단과 서울, 안양, 수원, 성남의 시립합 창단만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만큼 경쟁은 치열 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전공자들과 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 아침 일곱 시 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연습했다. 그 노력 끝에 78:1의 경쟁률을 뚫고 안양시립 합창단의 상임단원으로 입단하게 된다. 그는 “본격적으로 프로로 활동하게 되면서 많은 걸 느끼고 배웠어요. 하지만 이대로 안주하면 도태 될 거라는 생각에 합창단 생활을 하면서 대학원 을 다니게 됐죠”라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는 5년 동안의 합창단 생활을 하며 모아온 돈과 퇴직금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고 심 끝에 서른 살 되던 해에 성악 공부를 위해 이 탈리아로 떠난다. 그 당시는 한국이 IMF를 맞 아 원화의 가치가 폭락했을 시기였기 때문에 많 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가족 들이 함께 떠난 터라 생활비도 부족했고 아이에 게 우유를 사 먹일 돈도 부족했다고. 생활의 어려움 이외에도 전 세계에서 온 유학생들과의 경 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보이지 않는 전쟁이 그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뭔가를 이루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이 를 악물고 노력하여 마침내 3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이탈리아 로마의 국립 산타체칠리 아음악원(Santa Cecilia Conservatory of Music) 과 페스카라아카데미(Pescara academy)를 7년 동안의 유학생활 끝에 졸업하 게된다.
공연보다는 봉사활동이 더 보람
그는 현재 프리랜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고 서울신학대학에서 성악 강의를 한다. 또 실버합 창단인 나새합창단과 구로그린코러스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한 공연보다 어머니, 아버지 또 래의 노인 분들과 함께하는 실버합창단인 나새 합창단 지휘에서 많은 감동을 느껴요”. 나새합 창단은 충청대학 주최 월광금빛합창제 실버부 문 대상과 전국레크레이션협회에서 주최한 전 국대회에서 문화체육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이 뿐 아니라 요양원, 병원, 보육원, 소년원, 교도소 에서 공연을 하고 봉사활동도 한다. 합창단의 공연을 통해 몸이 불편하거나 자유 롭게 공연을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힘을 줄 수 있어 행복하다는 그.
특히나 치매 환자가 많은 노인요양원에 위문 공연을 갔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공연이 끝난 후 요양원 병실을 돌면서 간식 을 전해주고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그들이 손 을 쥐고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는 말을 전해 왔 을 때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구요”라며 지난 시간 을 회상했다. 또 소년원에서 공연을 했을 때엔 음악적 재능은 있으나 환경이 좋지 않아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만났단다. 그는 나중에 그 아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학교를 세우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꿈을 향해 도전하고 어려움을 이겨내야
[sws_blockquote_endquote align="" cite="윤기훈동문" quotestyle=style02]유학을 떠날 때 IMF등의 주변상황을 고려 했으면 떠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이루고 싶은 꿈을 확실하게 정했으면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죠. 남들이 유학을 마치는 서른 살에 유학을 떠났지만 제가 두렵지 않았던 이유는 목표가 확실했기 때문이에요[/sws_blockquote_endquote]라고 지난 날을 회상하며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원광대학교 재학생들도 지방에 위치한 대 학이라고 해서 좌절하고 용기를 잃을 필요가 없 어요. 절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고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자신의 멋진 인생 을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어려움을 이겨낸다 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윤기훈 동문.
그의 끊임없는 활동을 기대해 보자.
원대신문 김동영 기자 evezx@wk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