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질서·배려 등 인성교육 중시, 교육 철학
[지난 24일 정년퇴임을 한 김형중 동문(61세)을 만나기 위해 전주에 있는 전북여고 교장실을 찾았다. 김형중 동문은 소박한 옷차림과 넉넉한 미소. 김 동문은 엄격한 분위기의 교장선생님보다는 친근한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소탈해 보였다. 퇴임을 일주일여 앞둔 지난 18일, 김 동문의 발자취와 새로운 시작에 대해 들어봤다.]
불우한 초년, 끝까지 놓지 않았던 희망
"어렸을 때 아버님을 여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김 동문은 경제적 사정으로 중학교 졸업 후 1년 늦게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그 후 우리대학 농업교육과에 입학했다. 학비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대학의 낭만을 즐길 여력이 없었다. 그의 대학생활은 아르바이트 그 자체였다. "4년 동안 새벽 2시까지 회사 야간 경비를 서고 5시 반에 일어나서 애들에게 운동이나 공부를 가르쳤는데 그 애들이 저를 '형님'이라고 부르고 잘 따라서 지금도 자주 만나곤 해요." 김 동문은 힘들었던 시간을 추억하면서 웃음 지었다. 아르바이트의 연속인 대학생활에 지친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친구들과 산악회를 만들어 등산을 시작했다. 김 동문은 올라갈 때의 고통, 정상에서의 뿌듯함과 시원함, 내려올 때의 홀가분함을 느낄 수 있는 등산을 통해 인생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졸업 후 김 동문은 학과 교수의 추천으로 국가에서 주관한 미국유학 선발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하지만 '부선망독자(父先亡獨子)'였기 때문에 미국 유학의 꿈이 좌절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일찍 고인이 돼 병역 미필자이었는데 70년대 초에는 군복무를 하지 않으면 비자가 나오지 않아 해외에 나갈 수 없었어요." 이 때 자신의 자녀들만큼은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유학을 포기한 김 동문은 임용고시를 치러 국어 교사가 됐다.
참된 교사의 역할
누구보다 어려웠던 학창시절을 겪은 김 동문은 자신처럼 힘겹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 대학을 다닐 때부터 교사가 된 후까지 4년 동안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보수도 없었다. 그 곳에서 학생들과 함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젊음을 바쳤다. "제가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겠어요." 자기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야학 학생들에게 온 정을 쏟았다는 김 동문은 이 때문인지 매년 졸업식장은 눈물바다가 됐다고 한다. 전북여고 전 교장 김 동문은 학교에서 '인기쟁이'였다. 김 동문은 늘 교사들에게 ??당신들이 있기에 교장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교장이라는 권위를 앞세우는 것보다 뒤에서 밀어주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김 동문은 교사 외에도 '한국 농촌문학회 수석부회장', '전북 문인협회 부회장' 등 수많은 직위를 갖고 있다. 이 중엔 2인자라 불리는 '부회장' 직을 여러 협회에서 역임했는데 그의 경력에서도 드러나듯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김 동문의 성격이 묻어난다. '인사, 질서, 배려 등을 중시하고 학생들을 올바른 길로 안내할 줄 아는 사람'이 참된 교사라고 말하는 김 동문. 기자가 만난 김 동문의 인생이 바로 '참된 교사'였다.
교사 그리고 삼류시인의 새로운 시작
김 동문은 시집, 수필집 등 여러 권의 책을 냈다. 교육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칼럼을 쓴다고 한다. 또 「문예연구」시 부분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한 김 동문은 자기 스스로를 낮춰 '삼류시인'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시는 꾸밈이 없는 직유법을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그만큼 솔직하다. 화려한 시어를 내세우기 좋아하지 않는 그의 모습 그대로다. 교직의 마지막 5년을 이 학교에서 보낸 것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는 김 동문은 "30여 년 간 교육계에 몸담았지만 퇴임이 기쁘고 남은 생은 또 다른 방법으로 교육계에 헌신하고 싶다"고 말했다. 교육계를 위해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예순의 김 동문. 그의 빛나는 미래를 응원한다.
2009년 08월 31일